독일의 분단과 통일의 과정

2019. 4. 28. 23:43학문

독일 통일은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된 지 45, 동서독으로 분단된 지 41년 만에 1990103일 독일인들의 염원에서 이루어졌다. 서독의 독일 정책을 바탕으로 동독과 교류를 추진하며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독일 통일은 독일과 우리나라의 분단의 원인이 다르나, 아직도 분단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게 보여주는 것이 많다. 194559일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고 패전국인 독일의 무정부상태를 막기 위해 연합국은 4개국의 의해 분할 통치가가 시작되었다. 독일의 행정권과 통치권은 연합군이 수행하게 되었고, 군대도 해산되었으며, 나치의 지도자들도 모두 체포되었다. 연합국은 독일에서 민주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민주적인 정당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지방자치단체를 시행하였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표현의 자유와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육제도와 재판제도를 민주주의체제로 전환하였다. 연합국은 전쟁배상비를 독일에서 받아야 했으나, 독일이 현금으로 지불할 능력이 없어 각자의 점령 지역에서 산업 시설을 철거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그들의 목적을 유럽에서 실현하기 위해 양국의 합의하에 해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서방연합국 점령 지역은 자유시장원칙에 의한 독일연방공화국을 탄생시켰고, 소련군 점령 지역은 계획, 통제경제에 의한 독일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 그 결과 독일은 냉전의 시대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경험하였다. 1949523일 서방연합국 지역에서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이 발표되어 연합군 점령의 시대가 끝이 났다. 초대 수상 아데나워는 외교적인 면에서 친서방 정책으로 외교를 위한 초석을 다져놓았고, 정치적으로는 패전으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 위기 속에 있는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경제적으로는 전쟁을 겪어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 국가 경제를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는다. 브란트 수상은 독일의 외교적 역량을 동서 유럽으로 확대했으며, 과거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 주변 국가들에게 화해하고 용서를 빌어 신뢰 관계를 만들었다. 브란트 수상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 동서 유럽 국가와 우호 관계를 더욱 더 돈독히 만들었으며, 서독이 동서 유럽에서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고 독일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콜 수상은 경제 정책에 중점을 두며 외교 정책에서는 동방 정책을 통해 기존의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나라들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인간의 가치 회복과 인권 보호와 자유를 보장하고 준법 국가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였다. 콜 수상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와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결과 1989년 동독이 붕괴되고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주변국의 동의를 얻어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였다. 1990년 통일됨으로써 독일은 물론 유럽에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이룩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독일이 통일하기까지의 노력과 주변국가와의 이해관계를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분단의 역사 속에서 앞으로의 한반도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배울 점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1. 독일의 분단

2차 대전은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941년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선전 포고와 전쟁 개입으로 인해 전쟁은 온 세계로 확대 되었다. 2차 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의 4개국에 의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분할 점령되어 영토가 축소되었다. 따라서 독일의 행정권과 통치권은 물론 사법권과 경제권 등 모든 권한이 연합군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방침은 이미 전쟁 중에 열린 여러 회담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전쟁 후 독일 문제를 포함한 세계정치 질서를 정립하기 위한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 유일하게 전쟁 전부터 진행된 회담에 계속 참석한 소련의 스탈린이 베를린 근교에 있는 포츠담에서 회담을 시작했다.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 되었던 내용은 독일의 민주정치 실현과 나치 잔채 청산, 독일 군대 해산, 기업 연합 해체, 중앙집권주의적 정치체제 대신 지방분권주의 정치체제로의 전환 등이었다. 이 외에도 나치 시대 종교를 억압하고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방해하고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던 법률 조항들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전쟁 종범자들은 체포하여 법정에 세우기로 했으며 이밖에도 나치 정권의 정치 지도자와 나치 통치아래에 있던 정부조직과 단체의 고위 간부들도 모두 체포하기로 하였다. 3국은 이 협정에서 독일이 다시는 이웃 나라를 침략하거나 세계 평화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독일의 군사주의와 나치주의를 제거하고 또한 연합국이 의도하는 것은 독일 국민을 멸망하거나 노예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일 국민이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도록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경제 원칙과 관련하여 포츠담 협정은 점령 기간 중 독일 전체를 하나의 경제 단위로 취급하기로 했다. 그리고 군수 산업을 철거하고, 전쟁에 직접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물품의 생산을 엄격히 통제하기로 했다. 중화학 공업이 주축이 된 독일의 대기업을 해체하고 농업경제를 발달시켜 국민들을 기아에서 빠른 시일 내에 구제하기로 했다. 연합국들의 경제 정책 기본 목표는 독일 경제의 잠재력을 파괴하여 전쟁의 토대가 되는 모든 중화학 공업을 철거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장기적으로는 독일의 국가경쟁력을 약화시켜 국제시장에서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전쟁의 책임을 물어 최저의 수준에서 유지하도록 하고 현존하고 있는 산업 시설들도 통제하기로 합의했다. 포츠담 협정에서 논의된 중요한 내용의 하나는 독일의 영토 변경에 관한 것이다.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 선의 동부 독일 지역을 폴란드에 편입시켰다. 포츠담 협정으로 폴란드와 소련의 관할로 속하게 된 독일의 영토는 동프로이센, 쉴레지엔, 포메른, 브란덴부르크 일부 지역이다. 또한 독일인들의 이주 문제도 규정했는데,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을 강제로 독일로 이주하도록 했다. 이주가 합법적이고 인도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고 규정했으나 실제로는 강제로 추방되었다. 이주민들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으며, 이주하는 도중에 굶주림과 추위와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의 독일 역사를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면 위기의 시대 또는 궁핍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피해로 공장의 시설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독일 경제가 파탄에 처해 있었고, 식량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 국민들은 기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독일의 상황은 점령국들의 협력과 대립으로 인해 독일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2.독일 연방 공화국

포츠담 협정은 민주적 토대 위에 새로운 독일 국가를 수립하는 내용을 규정했다. 점령지 정책에 관하여 연합국 사이에 의견이 크게 대립했다. 소련은 점령 지역 전체를 공동으로 통치하기를 거부하고, 소련 점령 지역인 동부 지역에 소련식 국가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은밀히 추진했다. 소련이 점령 지역을 공산화한 데 이어 서방 연합국의 점령 지역까지 공산화를 시도하는 야욕이 드러나자, 미국은 독일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방 연합국 점령 지역만이라도 별도의 국가를 세우는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은 소련의 세력 확대를 봉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나라가 강제에 의하지 않고 자유로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미국 외교 정책의 주요 목표이며, 자유의사에 반하여 공산주의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나라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유럽으로 확대되어 마샬플랜으로 이어졌다. 마샬플랜은 미국의 독일 점령 정책의 변화로 부유한 유럽 건설을 위해 독일이 반드시 경쟁력 있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경제 재건을 위해 1947년 서방연합국은 독일에 가했던 산업 생산량의 제한을 해체했다. 마샬플랜의 단기적인 목적은 전쟁 후 어려움에 처해 있는 유럽을 가난과 절망에서 구출하는 것이고 장기적인 목적은 서유럽의 경제와 정치를 안정시켜 서방 연합국 자본주의체제를 확고히 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은 소련의 영향력이 서독까지 확대되는 것을 조기에 차단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동유럽까지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마샬플랜을 반대했다. 마샬플랜은 서유럽의 경제 재건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서독의 경제 재건에 절대적으로 기여했으며 전쟁 피해를 극복하고 자유시장경제체제에 편입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어 하나의 독일 국가를 세우는 것은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서방 연합국은 독일 경제 재건을 위한 마샬플랜이 효과적으로 실시되기 위해서는 화폐개혁이 시급하다고 여겼다. 화폐개혁은 위기에 처한 독일 경제를 구해냈고 새로운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지하시장과 사재기를 통해 영리를 추구했던 상인들이 더 이상 영업 행위가 불가능하게 되어 지하경제를 없애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화폐개혁 조치는 서독 지역의 경제 번영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소련 점령 지역이 제외되어 독일 분단을 더욱 가속시키는 조치가 되었다. 1948년 서독 지역과 서베를린에서 화폐개혁을 실시하여 국가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 시작된 것에 대해 소련은 베를린 봉쇄령을 통해 서베를린을 서방 연합국과 고립시켜 그들의 영향권 아래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소련은 베를린 봉쇄령을 선포하여 베를린에서 서독으로 통하는 모든 교통로를 차단하였다.

 

3. 베를린 장벽 설치

서방연합국은 소련과 합의 아래 단일 정부의 구성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그들의 점령 지역에서 국가를 출범시키기 위해 준비작업을 시작하였다.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헌법 작업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였다. 나치 시대 저항운동을 했던 기민당 출신의 아데나워를 지지하여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전쟁을 겪어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 가장 급한 것은 경제를 일으켜 국가 경제를 정상적인 상태로 올려놓는 것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복지지향적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성공함에 따라 짧은 기간에 전쟁 피해를 극복하였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국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한국전쟁은 사회적 시장경제의 성공과 독일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기 경제 정책은 기아와 생활필수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제 공업에 중점을 두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중화학 공업 분야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산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특히 중화학 공업 분야의 성장이 눈에 띄게 나타나는데 한국전쟁 기간에 군수물자가 부족하자 서방연합국은 서독에 대한 경제제제를 해체하였다. 그 결과로 인한 경제 성장은 많은 일자리가 생겨나 실업률이 감소하였고, 거의 완전 고용이 이루어져갔다. 1961년 설치된 베를린 장벽은 베를린의 위기였다. 1949년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과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이 세워진 후 두 독일 국가 체제가 굳어져 갔다. 그러나 동독의 한가운데 있는 도시 서베를린은 소련이나 동독에게는 목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서베를린을 지배하기 위해 1948년에 베를린을 봉쇄하려다 실패한 소련과 동독은 1958년 서베를린을 지배하기 위한 계획을 다시 추진했다. 베를린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자 서베를린 시장 빌리브란트는 1959년 베를린 정책에 관한 4개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4대 기본 원칙은 서베를린이 자유로운 독일에 속하고, 베를린의 완전한 자결권 보장, 베를린에 대한 4개 연합국의 책임 이행, 그리고 베를린으로의 자유로운 통행권 보장이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였다. 동독에서 농업 집단화가 실시되자 사유재산이 완전히 금지되어 동독의 젊은이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서베를린으로 피난하였다. 이들은 젊은 세대로 학문, 기술, 경제 분야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자질과 능력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동독인들의 탈출 동기는 다양하나 대부분 독재 정치와 박해로 자유로운 활동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536.17국민 봉기나 1958년 베를린 위기는 동독인들을 불안하게 하여 탈출을 더욱 촉진시켰다. 여기에다가 서베를린 시민들이 누리는 경젲거 윤택함은 동독인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동독인들의 탈출은 경제 발전에 장애요인이 되었고 산업 발전에 타격을 주었으며 사회 혼란까지도 초래했다. 동독의 경제 사정이 어렵게 된 데에는 공산주의의 이론에 의한 계획 경제를 실시한 이유도 있지만, 젊은이와 지식층들이 계속 탈출하여 고급 노동 인력이 줄어든 데 있었다. 늘어나는 피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독은 1961년 포츠담 광장과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탱크와 장갑차를 배치하였다. 동베를린과 동독에서 서베를린을 오가는 통행로가 차단되었다. 경찰을 동원하여 철조망을 설치하고 콘크리트 장벽으로 대체하였다. 그 결과 베를린은 동과 서로 완전히 분단되었으며 같은 도시 내에서 자유 왕래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 설치는 아데나워 수상에게는 정치적 타격을 주어 정치적으로 지명도를 잃게 하였다. 서방 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통일의 지름길이라던 아데나워의 정책은 베를린 장벽의 설치로 국민들 사이에서 신뢰를 잃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 후에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추진했던 친서방 정책과 경제 성장은 독일이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베를린 장벽 설치로 동독은 공산권을 제외한 전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동독인들로 하여금 탈출을 포기하고 경제 활동에만 전념하도록 하여 동독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4. 동서독의 교류

분단 기간 서독 정부는 독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독일 정책은 자결권을 평화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독일 민족의 권리에 근거하였다. 독일 문제는 유럽의 평화 유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력 포기는 서독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의 기본 원칙이며, 자유는 독일 문제의 핵심이었다. 서독 정부는 평화와 전독일 민족의 이익을 고려하여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분단 초기에 서독은 서독만이 전독일을 대표한다는 단독 대표권을 주장하면서 동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1960년대 들어 분단이 길어지자 서독은 분단에서 오는 어려움을 일부나마 완화하기 위해 동독과 교류를 추진하였다. 본격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기는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수상으로 취임하고,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된 이후이다. 분단 기간 동안 서독이 추진한 동독과의 교류로는 인적 교류, 문화 교류, 우편 통신 교류, 내독 무역 등이 있다. 서독은 동독과의 교류를 분단을 완화하기 위한 독일 내부 문제로 접근하며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동독은 체제의 약점 때문에 서독과의 교류를 외국 사이의 교류로 여기며 소극적으로 응했다. 서독 정부는 독일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서독과 동독 주민이 민족의 동질성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인적 교류는 서독과 동독의 교류에서 활발했던 분야이다. 서독 정부는 동독과 교류를 추진하면서 무엇보다도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들의 고통을 완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인적 교류가 확대되어야만 분단이 깊어지는 것을 막고, 더 나아가 통일도 가능하다고 여겼다. 서독 정부는 서독인들의 동독 방문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러나 동독 정부는 이와는 달리 동독인의 서독 방문을 노년층과 긴급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서독 정부가 서독인의 동독 방문을 적극 장려했지만, 서독인의 동독 방문은 전적으로 동독 정부에 달려 있었다. 특히 서독인의 동독 방문은 동독 정부가 내세운 여러 정치적인 조건으로 인해 많은 제한을 받았다. 그럼에도 동독에 부모나 형제가 있는 서독인은 1년에 1회의 방문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동독에 부모나 형제가 있는 서독인의 동독 방문은 대체로 가능하였다. 그러나 서베를린 시민에게는 동베를린 방문이 허용되지 않았다. 서독인과 서베를린 시민의 동독 방문 여건이 크게 개선되기는 베를린 협정에 이어 동서독 통과 협정과 동독과 서베를린 시의회의 여행 및 방문 교류 완화와 개선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된 이후이다. 동독 정부는 통과 협정과 합의서로 인해 서독과 서베를린으로부터 방문자가 크게 증가할 것을 우려하여 1973년 서독인 또는 외국인이 동독을 여행할 경우, 여행 일수에 따라 의무적으로 동독 화폐로 환전해야하는 최저 환전 금액을 이전보다 2배나 올렸다. 최저 환전 금액의 인상으로 서독인의 동독 방문이 어려워지자 독 정부는 가능한 한 많은 서독인이 동독을 방문할 수 있도록 동독에 차관 제공 등의 노력을 하였다. 1982년 헬무트 콜 정부도 동독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3년 서독이 11억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하고 이어 198495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추가로 제공하였다. 동독은 같은 해 환전 금액을 내리고 서독인의 동독 방문자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방문자 증가는 동독과 교류를 확대하려는 서독 정부의 꾸준한 노력으로 가능하였다. 서독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서로를 잘 이해하기 위해 동독과의 청소년 교류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동독은 청소년들의 서독 방문이 사회주의 체제 유지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를 들어 소극적으로 응하였다. 청소년 교류를 통하여 서독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독일에는 또 다른 독일이 있으며, 이는 외국이 아니고 독일 분단으로 인한 것임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인적 교류는 서로 다른 체제에 사는 서독 주민과 동독 주민을 연결시켜 주며, 서로의 실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교류였다.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는 것은 이산가족뿐만 아니라 분단된 서독과 동독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점령 기간에는 점령국사이에는 또는 동서독 사이에 특별한 협정이 없었음에도 우편과 통신은 계속 연결되었다. 1987년 서독에서 동독의 108개 전화국으로 자동 전화가 가능해졌다. 서독과 동독은 상품을 사고팔았는데, 분단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거래 품목으로는 서독은 동독으로부터 석유 제품, 섬유류와 의류, 화학 제품, 농산물 등을 구입했다. 그리고 서독은 동독에게 화학 제품, 농산물, 기계류 등을 판매했다. 서독이 동독과 무역 거래를 하는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동독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는 정치적은 목적이 더 강했다. 또한 서독은 다른 나라와의 무역에서 얻은 흑자의 일부를 동독에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동독으로서는 경제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5. 독일 통일

1980년대 후반 들어 동유럽에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동유럽의 개혁은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의 낡은 체제를 고치고, 막대한 국방비를 축소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개혁 정치를 내세웠다. 또한 외교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긴장 완화도 추구하고자 하였다.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정책은 자유를 갈망하는 동유럽인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동유럽 국가에서 개혁에 앞장선 나라는 폴란드와 헝가리였다. 폴란드는 동유럽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공산당 일당 독재가 막을 내린 나라가 되었다. 이웃 나라의 변화와 개혁에 아랑곳없이 동독의 집권층은 주민들의 개혁 요구에 냉담하였다. 동독에서는 1989년 실시된 지방 의회 선거에서 과거와 같이 정해진 후보자에 대한 찬성이 강요되었으며 선거 조작도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이러한 선거 부정에 대해 항의가 제기되는 등 동독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동독의 변화는 위로부터 시작된 헝가리나 폴란드의 변화와 개혁과는 달리 주민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시작되었다. 동독의 본격적인 변화는 1989년 여름 헝가리로 휴가를 나온 일부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가운데 동독에 남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산당과 지도층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은 시민운동 단체와 정당을 결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들은 곧 활발한 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동베를린에서는 재야 시민운동 단체인 신광장이 결성되어 등록을 신청했다. 그러나 동독 정부에서는 신광장이 반국가 단체라는 이유로 등록을 거절했다. 시민운동 단체와 정당들은 정치 개혁만이 동독을 구할 수 있다며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지방 도시인 라이프치히에서는 시민들이 니콜라이 교회에서 기도 모임을 갖고, 여행 자유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의 대규모 탈출에 이어 내부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로 동독 정부는 점차 어려움에 처하였다. 동독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동베를린 등 여러 도시에서 집회의 자유, 여행 자유화 등의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후에도 시위는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시위에 대비하여 수만 명의 동독 경찰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었으나, 시위대와 충돌은 없었다. 평화적으로 진행된 1989년 가을의 시위는 실패로 끝난 19536월의 봉기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동독은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인 혁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개혁을 요구하는 동독인들의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동베를린에서는 약 70만 명의 주민이 자유선거, 공산당의 일당 독재 폐지, 내각 퇴진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동독 공산 정권 수립 4년 만인 1953년 동베를린과 동독 전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 이래 가장 큰 규모였다. 주민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서독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독지도부는 획기적인 개혁 조치 없이는 국민의 불만을 해소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동독을 떠나는 사람이 계속 늘어났으며 이들 대부분은 능력이 있고, 한창 일할 젊은 층이었다. 이로 인해 공장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으며, 병원은 의사와 간호사가 부족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독의 경제 사정은 더욱더 악화되었고 동독 정부는 더 이상 개혁을 늦출 수 없었다. 이러한 판단에서 동독 지도부는 당 정치국을 전면 개편하였다. 개편된 공산당 정치국과 내각은 여행법이 새로 제정될 때까지 동독인의 베를린 장벽의 개방을 포함한 해외여행을 전면 허용하기로 하였다. 119일 밤 수많은 동독인들이 서베를린으로 몰려들었으며 베를린은 동서독인의 축제의 장이 되었다. 동독 정부의 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동독인들은 신정부의 개혁의지를 불신하고 전국적으로 시위를 계속하며 더욱 과감한 개혁을 요구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자 서독 정부는 서독인들의 자유로운 동독방문을 추진하였다. 서독인이 아무런 제한 없이 동독을 방문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는데, 1949년 분단된 이래 40년 만에 서독인들과 동독인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경제통합과 사회통합이 이루어져 서독 연방은행이 동독 통화와 금융을 관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독은 40여 년간 적용했던 중앙계획, 통제 경제를 포기하고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로 편입하였다. 국제 질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독일의 통일은 주변국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해당 국가와 기구는 연합국, 폴란드, 서독의 파트너 기구인 나토와 유럽연합 등이 있었다. 통일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는 폴란드 서부 국경선 인 오더-나이세 경계선 문제였다. 독일이 끝까지 오더-나이세 국경선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통일 작업은 그 만큼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831에는 통일의 실무 협상을 담당했던 서독의 쇼이블레 내무부장관과 동독의 크라우제 내무부장관이 통일 조약에 서명하였고, 912일에는 모스크바의 2+4의 마지막 회담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오더-나이세 경계선을 폴란드 서북 국경선으로 인정하였다. 920일에는 서독의 연방회의와 동독의 인민회의에서 통일 조약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서독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 된지 326일 만에 빠른 평화 통일을 이룩하여 45년 만에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소련의 동의 아래 통일된 독일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회원국으로 남아 있기로 하였다. 1990103일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에 의해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하였다. 동독은 서독의 기본법에 따라 독일연방공화국의 영토가 되었고 동독의 5개 행정자치 단체는 그 해 1014일 기본법에 따라 주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하였고, 122일에는 통일된 독일의 첫 번째 총선이 실시되어 수상을 선출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1949년 출범한 독일민주공화국(동독)40년이 통치 기간이 종식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독일 국민은 45년의 고통스런 분단을 겪은 후 1990103일 자유로운 자결권 행사를 통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했다. 지난 45년간 서독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를 동독은 공산 독재와 계획 경제 체제를 각각 유지하여 왔기 떄문에 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외교 안보 분야에서는 동독 주둔 소련군의 철수 문제, 동독이 제3국과 체결한 조약의 처리 문제, 서독 연방군과 동독 인민군의 통합 문제 등이 있었다. 헌법과 행정 분야에서는 기본법 개정, 연방 정부와 연방 하원의 베를린 이전 문제를 비롯하여 동독 공공 기관 근무자의 처리 문제가 있었다. 동독 공산 독재 정권의 과거 청산 분야에서는 공산 정권에 의해 피해를 당한 주민들이 복권되고 피해 보상도 이루어져야 했다. 점령 당국과 동독 정권에 의해 보상 없이 강제로 몰수당한 토지나 건물 등 재산의 소유권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동독은 통일 전인 1989년 가을에 이미 파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로서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웠다. 파산 상태인 동독 경제의 재건, 통일 비용 조성, 경쟁력이 없어진 동독 국유 기업의 사유화 문제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국유 기업의 사유화 과정에서 발생한 실업자 해결, 동독의 사회 보험 제도 확대 개편, 극심하게 오염된 동독 지역의 환경 개선 등의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단으로 인해 45년간 떨어져 살아온 서독 주민과 동독 주민의 내적인 통합이 중요했다. 서로 다른 체제에 있던 서독과 동독이 통일됨에 따라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통일을 위한 가장 중요한 문제인 내적인 통합을 위해서는 노력과 함께 동독 지역과 서독 지역 사이에 존재하는 경제적 격차를 해소하고, 동독 지역의 높은 실업률을 줄이는 노력이 꾸준히 이루어져야하였다. 분단의 또 다른 어려움은 분단이 오래 지속될수록 문화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되어 통일이 더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서독은 동독과 서로 다른 문화가 발전하는 것을 막고, 서독인들이 동독 문화와 사회생활에 관해 더 많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동독과 문화 교류를 적극 추진하였다. 서독은 인적 교류, 우편과 통신 교류, 문화 교류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동독과의 교류를 꾸준히 이끌어 나갔다. 분단 기간 중 서독은 동독과 이러한 교류를 하면서 경제 지원을 하였다. 서독은 이러한 지원을 하면서 지원 대가로 반드시 동독이 방문 조건 완화, 우편 통신 시설 증설 등의 관계 개선 조치나, 동서독 국경선에 설치한 자동 발사기의 해체 및 지뢰 제거 등의 인권 개선 조치를 하도록 하였다. 1990103일 이루어진 독일 통일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분단 중에도 이와 같은 다양한 교류가 꾸준히 있어 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통합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러한 어려움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의 서독과 공산 독재와 계획 여제 체제하에 있던 동독이 통일되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독일인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고, 동독 지역 주민들이 공산 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와 기본권이 보장된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생활하게 된 점이 독일 통일의 가장 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야기 독일사 - 박래식

분단과 통일의 독일 현대사 - 손선홍

독일 이야기 - 서울대학교 독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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